합동복구총회소개
대한예수교 장로회(합동복구) -구 독노회-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미국 남부 장로교회, 호주 장로교회 및 캐나다 장로교회 등 4개 장로교단의 선교사들이 모여 하나의 노회(독노회)를 조직하여 '조선예수교 장로회'를 세움이 '독노회'의 시작이었다.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미국 남부장로교회, 호주 장로교회 및 캐나다 장로교회 등 4개 장로교단의 선교사들이 모여 하나의 노회(독노회)를 조직하여 '조선예수교 장로회'를 세움이 '독노회'의 시작이었다.
평양에 있는 장로회 신학교를 제1회로 졸업한 7명(길선주, 방기창, 서경조, 송린서, 양전백, 이기풍, 한석진)을 목사로 안수하여 세웠다. 그런데 일제는 1910년 8월29일 강제로 조선을 합병시키고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할 목적으로 우리 글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또 창씨개명을 강요하여 학생, 일반, 교역자 등을 동원하여 일명 '부국대'라는 이름으로 노동을 강요하고 또 '학도병'이란 구실로 한국의 청년과 학생들을 징병하는 한편 교회 종을 헌납케 하고 더 나아가 1928년 조선 신궁을 서울 남산에 세우고 전국 각지에는 신사를 세우고 마침내는 한국 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1938년 9월 27회 장로회 총회가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열려 신사참배를 가결하여 조선 기독교 역사에 씻지 못할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신사참배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주기철목사를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되었고 일제는 가차없이 이들을 체포, 구금하였다. 1938년 신사참배 결의 이후로 참 신앙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계명에 의한 순수신앙을 지키려다 목숨을 잃고 순교하기에 이르러 주기철목사를 비롯 50여명이 순교를 당했고 8.15해방을 맞아 20여명만이 출옥하였다.
1945년 8월 17일 출옥한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고향과 가정으로 돌아가지 않고 순교하신 주기철목사님 댁과 '산정현교회'로 찾아가 위로하고 승리를 감사하는 예배를 드린 후 교회 재건에 대하여 토의하였다.
이후 재건 과정에서 '재건파교회'(김린회전도사, 박신근집사, 최덕진전도사, 이광록집사)와 '고려파교회'(남한출신 중심으로 한상동목사, 주남선목사), '독노회'(북한 출신 중심으로 이기선목사, 방계성전도사, 오윤선장로, 조만식장로)의 3개로 따로 조직이 되었다. 이리하여 '독노회'는 7년간 옥고를 겪은후 출옥한 이기선목사가 주축이 되어 여러 지도자들과 뜻을 같이하여 1907년 9월17일 한국 장로교회가 처음으로 '독노회'를 조직하였던 순수한 '순교신앙'으로 돌아가자는 의미로 1948년 5월에 '독노회'를 조직하여 "혁신복구파"라 하였다.
1907년 9월17일 한국 장로교회가 처음으로 '독노회'를 조직하였던 순수한 '순교신앙'으로 돌아가자는 의미로 1948년 5월에 독노회를 조직하여 "혁신복구파"라 하였다.
이때 이북 5도 연합노회인 '독노회'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27회 총회에서 제명시켰던 주기철목사님을 복권시키고 방계성전도사에게 처음으로 목사안수를 하였다. '혁신'이란 신사참배한 분들에게 다시 회복의 길을 주었는데 대표 약간 명을 중심으로 예배를 인도케 하고 전교회는 3일간 금식기도를 이행하며 혁신기간을 6개월 이상으로 한다는 것이고 '복구'란 교인은 근신기간을 두어 끝나는 때, 목사의 사회로 '복구문답'을 거쳐 교인자격을 주고 목사직은 시무투표로 하고 기타 직분은 장로교헌법에 따라하고, 내용은 순교중심, 성경중심, 십자가의 도를 중심으로 혁신복구하자는 것이었다. 이제까지 일제와 맞서 싸우며 환란을 겪어야했던 '독노회'를 비롯한 기독교는 또다시 좌우익으로 갈라져 공산당으로부터 시련을 겪게 되었다.
공산당은 '기독교연맹'을 조직하여 기독교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주일에 선거를 실시하면서 교역자들을 가담케 하였고 전에 신사참배하였던 사람들은 또 다시 '기독교연맹'에 가입하여 공산당 앞잡이가 되었다. 이때 독노회는 무신론과 유물론에 입각한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연맹의 가입을 거부하였다. 이에 공산당은 또 다시 일제와 같이 독노회의 고역자와 성도들을 투옥하였으니 이때에 이기선목사, 조만식장로, 방계성목사, 주영진전도사 등이 순교 및 박해를 받았던 것이다. 1951년 3월 전쟁과 핍박으로 독노회가 이북에서 활동을 못하게 되자 이일하, 장기려 등에 의해 부산 대청동에 천막으로 "산정현교회"를 설립하여 혁신복구파인 독노회의 정신적 전통을 계승하였다.
1951년 3월 전쟁과 핍밥으로 독노회가 이북에서 활동을 못하게 되자 이일하, 장기려 등에 의해 부산 대청동에 천막으로 "산정현교회"를 설립하여 혁신복구파인 독노회의 정신적 전통을 계승하였다.
1959년 2월 서울 환도 후 서울 후암동과 화현동에 '산정현교회'가 설립되어 독노회 정신을 이어오다 1967년까지 독자적인 교단체계를 이루지 않고 고려파, 통합파, 합동파, 중립파등 다른 교단에 소속해 있으면서 횡적인 유대관계만 맺고 있었다. 1967년 4월 17일 정대신목사를 중심으로 후암동 '산정현교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를 재조직하여 교단으로 정식 출범하였다. 당시 교세는 3개 노회(중앙,동부,한남), 교회는 14교회이고 신도 수는5,016명이었다.
독노회의 중흥은 1977년 4월19일 후암동 '산정현교회' 안도명목사(주기철목사 밑에서 청년부와 흥사단에서 활동)가 총회장이 되면서 주축이 되어 문공부에 종교현황 보고를 마치면서 이뤄졌다. 이때 독노회의 신앙노선과 순교신앙의 생활화를 부르짖는 교회와 지도자들(이명호목사, 김진학목사, 윤용현목사 등)이 많아지므로 독노회를 총회로 승격하여 교단 중흥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이때 독노회의 신앙노선과 순교신앙의 생활화를 부르짖는 교회와 지도자들(이명호목사, 김진학목사, 윤용현목사 등)이 많아지므로 독노회를 총회로 승격하여 교단 중흥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1982년 6월 15일 당시 총회장이었던 안도명목사가 미국으로 이주함에 따라 제26회 정기총회가 후암동 '산정현교회'에서 열려 윤용현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하고 독노회 총회를 재조직하여 복구하고 독노회 총회 산하 남부노회, 중부노회, 서울노회를 재조직하였다.
1989년 4월에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에 28번째 가입하여 회원교단이 되었고, 1992년 9월 22일에는 '대한예수교 장로회협의회(예장협의회)'에 가입하여 설립회원 교단이 되었다. 1997년 3월 1일에는 '한국장로회협의회(한장협)'와 '대한예수교 장로회협의회(예장협)'가 합동총회를 개최하여 '한국장로회연합회(한장연)'로 출범하여 본 총회가 '한장연 창립회원' 교단이 되었다.
2006년 3월 17일부로 '독노회총회'를 잘 알지 못하고 하나의 노회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어 본래 '혁신복구' 의미를 찾아 "우리 모두 하나되어 '순교신앙', '십자가의 도', '죽고 부활의 신앙'으로 혁신복구하라"는 의미로 '독노회'를 '합동복구총회'로 개명하여 이제 '독노회총회'가 '합동복구총회'로 다시 새롭게 출발하고 있다.
2006년 9월 15일 총회장으로 당선된 박남교목사가 현재 총회를 이끌고 있으며 '합동복구총회'가 기독교병원인 '서산중앙병원'을 2006년 3월 17일 서산에 세움으로써 소금과 빛을 발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있다.
[참고자료] 대한예수교 장로회(독노회)총회록
최훈 "한국 재건 교회사" 성광문화사
안도명 "신사참배 반대 투쟁 정신사" 해선출판사
박용규 "북녂에 두고 온 교회" 생명의 말씀사
김덕환 "한국 교회 교단 형성사" 임마누엘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