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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적인 신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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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적인 신앙인 / 막10:46-52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을 믿고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입니다.
성도 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나의 계획과 목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인생에서 그것을 목표로 삼고 좇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올바른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은 어떤 취미나 문화적 교양 이상으로 삶의 중심이며, 인생의 가장 중요한 삶의 뿌리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많은 신앙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변화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는 말씀이 우리의 삶 한 가운데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감동적인 신앙인을 오늘날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는 전체적으로 쇠퇴하고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우리 한국 교회의 성도 수는 감소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쇠퇴의 길을 걷게 된 이유가 여러 가지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세상과의 불통입니다. 요즘 우리 한국 교회는 세상과의 소통에 관심이 없습니다. 세상의 공감을 얻어내고 더 나아가 세상의 감동을 얻어 내겠다는 의식과 생각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인디아나주의 작은 마을에 뇌종양으로 고통 받고 있는 15세의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계속된 방사선 치료와 화학요법으로 머리카락이 모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런 모습으로 부끄러워 학교를 다니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때 그 사실을 알게 된 그 반의 학생들은 그를 돕기 위해 모두 삭발을 하였습니다. 뇌종양을 앓고 있는 브라이언만이 유일하게 머리카락이 없는 학생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 반의 아이들 모두가 머리를 삭발 한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오늘 우리는 감정은 폭포수처럼 쏟아지는데 감동은 메마른 시대, 감동 결핍증에 걸려 정서가 유산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세기를 초월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은 세상에 살면서 감동을 주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냥 교회를 다니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책임이 있습니다. 다음 세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아름답고 건강한 공동체입니다. 나의 자녀들과 손자들이 마음 놓고 기쁨으로 다니고 싶은 교회를 만들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 속에서 존중히 여김을 받고 세상에 감동을 주는 명예로운 공동체로 다음 세대에 남겨 주어야 합니다. 지금 좋은 교회가 아니라 갈수록 더 좋아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은 맹인 거지 바디매오의 이야기입니다.
여리고에 바디매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길에 앉았다가 여러 가지의 장애물을 극복하고 예수님께 소리를 질러서 눈을 뜨게 되어 앞을 본 사람입니다. 바디매오는 대단히 감동적인 사람입니다.
 
그 이유는 바디매오에게는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을 극복하고 승리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고난과 역경이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어닥치고 있습니다. 시험의 고통과 좌절, 결혼과 직장생활의 여러 문제들, 경제적인 가난의 문제, 질병과 때 아닌 각종 사건 사고, 자녀와 가족 간에 갈등과 마찰,함께 살던 가족과의 이별, 자식에 대한 서운함과 노년의 외로움, 우리에게는 나이에 따라서 여러 문제들이 다가 올 때에 우리는 그때마다 새로운 인생에 길을 개척해 나가는 것입니다. 만약에 들이닥친 여러 가지 문제와 새로운 환경을 극복하지 못하고 낙심하고 포기한다면 인생에 실패자가 되는 것입니다.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는 바디매오가 새로운 인생을 개척해 나가는 개척정신은 복잡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대단히 훌륭한 귀감이 될 것입니다. 바디매오가 자신의 불우한 처지, 환경을 어떻게 개척해 나가는가 감동적인 장면을 보면서 우리도 자신의 어려운 환경일지라도 새롭게 개척해 나가며 많은 분들에게 감동적인 신앙인의 삶을 보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감동적인 신앙인이 되려면
 
1,듣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46-47)
 
“[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본문 47절에 나사렛 예수시라는 말을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들음을 통해서 시작이 됩니다. 맹인은 보지 못했으나 듣는데 예민하였습니다. 내면적인 열망이 있었습니다. 외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만약 그가 귀를 기울이기를 포기하고 있었다면 예수님이 지나가도 관심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지나가는 것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아직 그의 안에서 무엇인가 살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장애를 벗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가장 관심 있는 나사렛 예수, 바로 다윗의 자손, 이 땅에 오실 메시아가 자기 옆에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습니다.
 
바디메오가 이렇게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주님의 은총을 간구하게 한 것은 예수님이 이곳을 지나가신다는 이야기를 누군가가 소경에게 계획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때 능력 있는 말씀을 증거 하시며,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셨으므로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렇게 널리 알려진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 사람들은 서로 알고 있는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 이야기를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디매오가 눈을 뜨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디매오는 분명히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믿음을 가졌습니다.
“나도 예수님을 만나면 볼 수 있겠구나.”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들어야 생깁니다. 말씀을 듣고, 좋은 소문을 들어야 합니다. 듣지 아니하면 믿음이 생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0장13-14절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들이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으면 믿음이 생겨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알고 있는 예수님의 소문을 내야합니다. 내가 경험한 예수님을 소문내야 합니다. 이 소문을 들은 죄인이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으면 절망에 처한 사람이 소망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으면 불행의 늪에서 허덕이던 사람이 행복의 자리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우리는 조금 더 성숙 된 믿음을 가지기 위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최대 관심사여야 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구원을 얻고 믿음이 있어야 변화를 얻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얻을 수 있는 자리라면 무조건 귀를 기울이여야 합니다.
하루 하루의 삶을 돌이켜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더 나은 믿음, 더 큰 믿음, 더 확고한 믿음이 자라나고 생성되는 시간이 되도록 삶의 우선순위를 조정해야 합니다.
삶의 변화는 더 나은 믿음 더 큰 믿음 더 확고한 믿음을 지닐 때 따라옵니다.
 
성도 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게 하여야 하며 말씀이 나를 지배하여야 하며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요한복음15장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하였습니다.
신앙인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거하고 그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형식만이 아니라 내실이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실 이 세상에서 가장 축복된 일이 있다면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말씀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 우리에게 가장 큰 감격이고 축복입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는 삼천리 방방곡곡 주일마다, 수요일마다, 철야기도회 때마다, 매일 매일 새벽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 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책으로 인쇄된 책 자체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말씀이 예배 때마다 강단에서 선포되어질 때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단이 이 말씀을 듣는 일에 방해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혹 설교시간에 졸고 있는 분들은 단지 육신이 피곤해서 졸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 병은 고치지 못합니다.
이것은 영적인 전투임을 알아야 합니다.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귀에 들리지 않도록 세상일로 피곤하게 만들어서 말씀 듣는 시간에 졸음이 오게 만들고 또한 마음과 생각에 잡된 일로 어지럽게 만들어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늘의 교회를 상징하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편지하면서 끝마다 하시는 말씀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고 하셨는데 그 이유는 한마디로 마귀의 역사는 방해하는 역사인데 그것은 말씀을 방해하는 역사라는 점입니다.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우는 사자와 같이 날뛰고 있습니다. 한편 성령의 역사는 말씀을 듣고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는 일에 그 어떤 이유로도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여전히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목회자는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선포해야 하고, 듣는 사람도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듣는 사람은 선포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할 수 있도록 자기 욕심과 자기주장과 이해관계를 떠나서 들어야 합니다. 자기 기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자기 생각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선포하는 사람도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됩니다. 선포하는 사람은 듣는 사람의 반응에 상관없이, 듣는 사람이 좋아하건 싫어하건 반대하건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하지도 말고 빼지도 말고 숨기지도 말고 가리지도 말고 선포해야 합니다. 베드로처럼, 절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협박하는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인가를 판단해 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이 땅에, 이 나라에, 이 교회에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선포되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듣는 역사가 시작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의 삶이 변화되고, 우리가 새로 시작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듣는 신앙을 가지고 있을 때 바디매오처럼 감동적인 신앙인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2.열정과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48-49)
 
“[48]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 일행은 여리고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목전에 두고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가시는 중입니다.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호산나, 호산나 찬송을 하며 따랐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머물러 서신 것입니다. 모든 행렬이 중단되었고 열 두 사도와 군중들도 발길을 멈추고 웅성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발걸음을 붙잡은 것은 소경 거지 ‘바 디매오’였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무리속에서 들려오는 외마디 절규를 듣고 멈추어 서신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부르짖음이 예수님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바디매오가 예수님 앞에 나가려고했더니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내면적인 장애물은 벗을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꽉 닫아두려고 했던 것은 열어놓았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이 예수님과의 가까이 갈 때까지 너무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가 소리 지르는 것을 옆에 있는 사람들이 제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8)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를 연거푸 두 번합니다. 성경에는 두 번 쓰여 있지만 아마도 예수님이 들으실 때까지 여러 번 소리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리를 들으면서 주위의 사람들이 제지합니다. “시끄럽다. 조용히 해라. 너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못 듣는다. 너 같은 사람이 메시아인 예수님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라고 하면서 그를 더 멀리 쫓아내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믿음으로 가는 길에 가장 힘든 장애물은 바로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나를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내 마음을 몰라줍니다. 같은 믿음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결정적으로 내 믿음의 불에 찬물을 끼얹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디매오는 자기 현실 수많은 사람들의 방해에 눌리지 않고 더욱 심히 호소한 믿음을 가졌습니다.자기는 확실히 믿기 때문에, 이 예수님만 잡고 예수님이면 자기 문제는 해결이 된다는 사실을 믿고 그 방해받는 것이 생명 뺏기는 것보다 더싫었기 때문에 마구 결사적으로 달려들었습니다.
 
여기에 원하는 것을 얻는 용기가 있습니다. 아무리 방해해도 아무리 걸림돌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는 이가 원하는 것을 얻는다는 진리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포기 시키는 자는 패배의 길을 가지만 스스로 자신을 승리케 하는 자는 승리하게 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는 길에는 순탄한 과정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많은 걸림돌이 있습니다. 그 걸림돌을 극복하고 뛰어 넘는 자만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실 본문의 바디매오에게는 그가 예수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유일한 희망 이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외에는 그 누구도 자기를 새롭게 할 수 없다고 그는 생각 하였습니다. 그는 전력을 다해 예수님께로 나오려고 애썼습니다. 사람들의 방해가 예수님에게 나아오려고 하는 그의 열심을 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소중하게 여기던 것들이 그를 자리에 붙들어 놓지 못하였습니다.
 
주석가 바클레이는 "무엇으로도 예수님은 만나고자하는 바디매오의 고함소리를 막을 수 없었다" 고 하였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의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바디매오가 사람들의 장벽때문에 주저 앉고 말았다면 그의 기대감이나 희망은 좌절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려면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장벽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우리가 예수님 앞에 이르기까지에는 많은 신앙의 장애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신앙의 장애물도 이겨가야 합니다.
 
사람들의 핀잔이나 꾸짖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부르짖는 바디매오의 소리에 주님은 걸음을 멈추셨습니다.그렇습니다. 계속 부르짖는 기도는 예수님의 걸음을 멈추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부르짖으면 예수님의 주의를 기도하는 사람에게 집중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이 소경이 기도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그곳을 그냥 지나치고 말았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디매오의 열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너무 안이한 것이 아닌가? 너무 쉽게 너무 간단하게 교회 몇 번 나오는 것으로 끝내버리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기도 몇 번하고 응답이 없으면 아 하나님은 별것이 아니구나! 교회 몇 번 나오고 별것이 없는 것 같으면 아 교회도 별것이 아니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기도할 때 단 한번 기도하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역시 나 같은 사람이 기도해보았자 무슨 응답이 있어,난 역시 안 되는구나! 기도를 했는데 기도 응답이 없구나"하고 포기할 때가 많습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도 단한 번 혹은 두어번 교회에 나오고는 별것이 없구나 하고 포기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찾고 구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성경에 구하라 주실 것이요 하였습니다. 이 구하라는 의미는 현재시제입니다. 이는 지속성의 의미입니다.계속해서 구하라. 계속해서 찾으라.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라하십니다. 한번만 두드리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두드리라는 말입니다. 두드리고 또 두드리고 또 두드리면 마침내 열린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딱 한번만 두드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자동판매기처럼 돈만 넣으면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 믿음의 얼마나 진실한가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분명히 예수님께서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주실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주위 사람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환경을 초월하여 더욱 적극적이고 간절한 태도로 예수님께 부르짖었던 바디매오처럼 응답받을 때까지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대로 포기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우리를 도우시는 예수님께 끝까지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열정과 확신이 있는 신앙을 소유한 성도가 감동적인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3,예수님께 나아가는 신앙이어야 합니다.(50-52)
 
[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바디매오는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 겉옷을 내버리고 달려갔습니다. 인생이 가장 큰 용기는 자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안일과 사욕을 포기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사람입니다. 바디매오에게 겉옷은 항상 곁에 있어 추위와 더위를 가려주는 유일한 재산이요 환경이요 문화였습니다. 우리는 천성을 향하여 출발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속에 얽매인 정욕의 거미줄을 끊어버리지 않으면 달려갈 수 없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겠다는 소원을 이루기 위해, 그는 다 희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뛰어서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사실 앞이 보이지 않는 맹인 뛰어서 왔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잘못하다가는 앞에 있는 물체에 부딪힐 수도 있고, 개울에 빠져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맹인들은 하얀 색깔의 지팡이를 들고 조심조심 한 발자국씩 움직입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즉시로 뛰어왔습니다. 그 동안 구걸할 때 쓰던 깡통이나 수저도 챙기지 않고, 지금까지 동냥한 돈을 주머니에 챙겨 넣지도 않고, 자기 자리 좀 지켜달라고 옆 동료에게 부탁도 하지 않은 채 즉시로 예수님께 뛰어 왔습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얻기 위해서는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소원을 위해서 나머지는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예수님을 만나는데 장애가 되는 겉옷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자존심의 겉옷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체면의 겉옷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돈의 겉옷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감투의 겉옷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러한 거추장스러운 겉옷을 벗지 않고, 단단한 껍질을 깨지 않고는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나가기 위해 겉옷을 내던졌던 바디매오처럼, 중요한 하나를 위해 중요하지 않은 아홉을 버리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버리는 것이란 포기하는 것과도 같은 의미입니다.
포기하는 곳에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포기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더 좋은 것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 좋은 땅이었지만 그것을 포기하고 롯에게 주자 하나님은 더 좋은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배우는 교훈이 있습니다. 집착하고 있는 것을 버리기 전까지 더 좋은 것이 보이지 않지만 집착을 버리면 더 크고 넓은 세계가 보인다는 것입니다. 내 것, 내 생각 내 뜻을 집착하는 한 넓은 세계, 넓은 생각, 넓은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내 생각, 내 집념 , 내 욕심 포기할 때 더 넓은 세계를 맛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11절에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하였습니다.
장성하기 위해서는 버릴 줄 알아야 하고 더 누리기 위해서는 떠날 줄 알아야 하며 더 풍성하기 위해서는 포기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옛 정욕, 옛 습관, 옛 생각을 버려야만 내 생각이 충만해지고, 내 마음이 풍성해집니다.
 
오늘 성도 된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가기 위하여 버리는 결단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하나를 가지면 나머지는 버려야 합니다. 다 가질 수가 없습니다. 다 가져서도 안 되고 다 가지도록 되지도 않은 세상입니다.
하나를 가졌으면 나머지는 과감하게 버릴 수 있어야 신앙생활이 가능 합니다.
”나는 세상도 즐기고, 예수님 믿어 구원도 받고 싶다“ 고 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지만 그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둘 중에 하나는 버려야 합니다.
 
사실 예수님께 나아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는 안 됩니다. 때로는 자기의 취미도, 자기의 개성도, 친구도, 물질도 다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 때문에 때로는 세상적인 의무도 포기할 때가 있습니다. 가정 일을 다하고, 직장일 다하고, 친구들 다 만나면서 할 수 없습니다. 우선순위가 예수님을 따르는 일입니다.
 
올바른 신앙생활은 하나님 제일주의, 예수 제일주의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또한 아무도 아무 것도 하나님 앞에 둘 수 없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사람이든 물질이든 이것은 모두 우상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뒤를 따라가는 제자의 삶을 사는데 방해가 되는 것들, 사람이건, 물질이건, 명예나 지위이건, 그 어떤 것이라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며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로 살기 위해서는 세상 것들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눅 9:61-62). 또한 우리는 재물에 대한 욕심이나 염려를 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제자의 길을 가는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때로는 이웃사랑 때문에 자신이 위험에 처하기도 하고, 또한 재물의 손해를 보는 일도 각오해야 합니다. 끝내는 제자로 사는 일로 인하여 고난을 받고 죽을 각오로 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가는 제자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참으로 신앙생활에는 휴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운행하시는 이 세상에는 휴일이 없습니다.믿음으로 예수님을 찾았던 바디매오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소리를 듣는 순간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즉시 예수님을 쫓는 자,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되었습니다. 환경이 좋아졌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소경 바디매오는 눈을 뜨자마자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러한 바디매오의 신앙은 우리들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1,듣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46-47)
2,열정과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48-49)
3,예수님께 나아가는 신앙이어야 합니다.(5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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